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 1

‘집안의 교회 칼럼’ #167 _ 아브라함의 믿음

2023년 3월 첫째주 칼럼 (2023.3.5. ~ 2022.3.11.)

사순 제2주일

창세기 12:1-4

로마서 4:1-17

요한복음 3:1-17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의 회원입니다.
산헤드린은 기원전 3세기경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최고 집단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족장)의 세 분파로 구성된 71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산헤드린 의원은 최고의 영예이자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 의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신분 때문에 낮에는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지만 밤에는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께 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라 하는 바리새인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이니이다”(요 3:3) 1 -2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임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이 단순히 육신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성령의 문제로 설명하십니다.
육신의 일만 생각하면 거듭날 수 없고 성령의 일을 생각하고 믿으면 거듭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약성서의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원망과 원망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어 불뱀에게 물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모세에게 장대 위에 놋뱀을 매달게 하셨습니다.
놋뱀이 살아나다.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장대에 달린 놋뱀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율법이 자기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 유대인들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할례였습니다.
할례는 율법 중 하나의 예입니다.
할례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환상이었습니다.
이 속임수는 기독교인이 되어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지속되었습니다.
나는 율법의 많은 부분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할례의 유일한 부분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조차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가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보다 할례를 앞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상황은 기독교 유대인과 유대인 유대인에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할례는 이러한 잘못된 관행과 관습처럼 때때로 우리를 망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오해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믿음의 시조요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은 그가 할례를 받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니라”(창 15:6-7)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나님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믿었을 때를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신이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할례를 받았고 나는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먼저 믿음을 고백하고 행한 아브라함이 표징으로 할례를 받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모든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명령입니다.
고향과 친족과 아비 집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그 땅을 보여주고 거기로 가라고 말하겠습니다.
과연 이 말씀을 어떻게 믿고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보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이 되어서야 하나님께서 할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는 떨리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할례로 이삭을 주겠다는 확실한 표징을 주셨습니다.
할례가 먼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분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할례가 먼저가 아니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 먼저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할례를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만들지 마십시오!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어떻게 계산하였느뇨 할례냐 무할례냐 할례로가 아니요 무할례로라 그가 무할례 때에 믿음의 의로 인친 할례의 표를 받았으니 무할례자가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느니라 누가 믿었어.” , 그들도 의가 되려 함이니라”(롬 4:10-11).

바울의 노력은 그가 자유로운 신자로 살 수 있는 길을 닦았습니다.
바울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이제 할례는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을 찾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하고 그것을 정복하고 하나님이 의이심을 믿는 여정에 몸을 짊어져야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이런 견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종교개혁은 천주교의 종교적 행위인 할례를 폐지하기 위해 일어났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을 통해 다시 말씀과 성경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개신교는 또 다른 형태의 할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종교적 관습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것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할례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 건물에 머물지 않고 온 세상에 흩어져 계시는 작은 예수님을 찾아 끊임없이 그들에게 나아가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벗어야 할 할례입니다.

나에게 가장 큰 할례는 교회 건물과 교회라는 제도였다.
우리는 여전히 이 할례에서 벗어나는 길에 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교회 건물과 제도의 가지치기를 피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 가정교회로 함께 길을 열어가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저의 첫 번째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카오톡 채널에 칼럼을 공유하고 카카오톡과 블로그에 대한 게시판을 만드는 것도 이번 미션에서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은 대개 집입니다.
교회는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칼럼 하나, 주보 하나로도 집회가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칼럼과 주보가 많은 사람에게 흐르고 두세 사람이 모이는 모든 곳이 교회가 되고 예배하는 곳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 그 믿음으로 우리 모두가 할례의 걸림돌을 이기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