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은 삶, 하늘을 바라보며. 그런게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해질녘에 나는 그의 시판 앞에 서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약간의 고백으로 면죄부를 얻었습니다.
바람 부는 삶의 짧은 순간, 또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왠지 모르게 눈가에 촉촉함을 느낄 때
시의 한 구절이 무거워지며 흩어진 내 시선을 여기저기 흔들었다.
그때의 어렴풋한 기억의 조각
광복절을 맞아 TV 프로그램 윤동주 발자취에서
“고통받는 남자”가 되어 허락된 십자가와 함께 죽는 후쿠오카의 감옥을 스케치한 순간,
눈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 채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시인의 마음과, 혹은 뜨거운 마음에서 솟아나는 청춘의 열정과 부딪히고 또 부딪히다
철조망이 있는 초라한 타국에서 허락되지 않은 아이디어로 가는 길
십자가로 채워진 20년의 인생.
20대에 만난 그의 흔적은 대를 이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페이드 인이 반복됩니다.
그는 멈춘 인생의 두 배 이상의 고통을 겪고 있다.
대학 1학년 인문계 첫 수업. 지금까지 그의 열정이 빚어낸 그 한마디.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
돋보기 아래의 삶은 많은 작가들이 모두가 비극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삶의 산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고갈의 정점이 14세기에 유럽을 강타하고 인구의 4분의 1을 죽인 전염병처럼 올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시적인 가벼운 팬데믹인 줄 알았는데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단순히 아픈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은 가족의 생명을 부양하는 것입니다.
자본의 기둥을 흔든다.
안타까운 죽음은 과거 흑사병으로 희생된 2500만 명 중 10분의 1,
이제 여파가 너무 커서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내 회사도. 경제적 파멸 그 자체의 쓰나미.
즉시 매출이 70 % 감소했고 은행의 도움으로 직원의 급여가 지급되었습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려 했지만 유급휴가와 무급휴가가 반복됐다.
직원들의 책상 위에는 해고통지서만 남아 있었다.
거친 파도 위에 서서 균형을 잡으려 해도 단단하고 무겁게 떨어져 어지러움만 느낄 뿐이다.
엔딩이 있을텐데 엔딩이 어딘지 몰라서 더 답답하네요
기억이 흐릿한 곳에서 시를 만났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온다는데 눈을 뜨고 떠도
오늘이 끝없이 반복되는 절망의 현실을 표현한 시가 아니다.
17세의 시인이 1934년의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느꼈을지 알 수 없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간도 북부의 191개 민족학교에서 약 80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오늘 영동주는 답답함에 웅크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겨울, 찬바람, 끝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 시대 청년,
어둠을 떨쳐버리고 빛을 찾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은 윤동주 시인.
매일 만나는 오늘을 쌓아 내일로 나아간다고 한다.
칠흑 같은 적국의 철조망 속에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이 발걸음은 끊어졌지만,
그의 시어 중 많은 부분이 시간의 공간 속에 상징처럼 남아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이 불타버린 남쪽 목장을 나오며 남긴 명대사
“내일 해가 뜬다”와 관련된 붉은 태양
낮은 목소리로 읊어보는데 내가 윤동주 앞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만,
숨을 쉬고 걸어야 오늘 이 자리에 올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내일은 없다 – 젊은 마음에게 물었다
윤동주
내일 할
나는 물었다
밤이 깨어날 때
내일이다
새로운 날을 찾고 있었어
잠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그럼 내일이 아니야
오늘이었다
군중!
동료!
내일은 없다
1934년년도